듣보잡

잡것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왜냐면 우리 스스로가 잡것이기 때문이다.

듣도 보도 못한, 정통성 부족한 사람들이 힘으로 뒤흔들어 놓은, 근대국가 이념과도 관련 없고 민본주의 전통과도 상관없는, 말 그대로 듣보잡이 뒤흔들어 놓은 듣보잡 공화국인 것이다. 현대화 되었다는 것의 다른 말이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 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건물들을 보면 이게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인지 의심하게 한다. 우리가 입고 마시고 먹는 것들 역시 듣보잡이다. 음식문화의 변화라는 것이 그나마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특성이 있어서 좀 나은 형편이긴 하지만.......

우리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국토개조의 역사가 전 세계적으로 있질 않았다. 한국의 근대야 말로 세계 보편으로 볼 때 듣보잡인 것이다. 그 중에도 특히 서울, 유래 없는 독보적 듣보잡 아닐까?

이쯤해서는 생각해 가면서 얘기해 가면서 뒤돌아보면서 가야하지 않을까? 듣보잡이 아니라 근거 있는, 사유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시하며 삶의 터전이란 것은 어때야 하고 공동체란 것이 어떠해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 그래야 잡것이 더 이상 잡것이 아니고 주체에 의해 걸러진 우리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는 권선징악의 스토리와 무관하게 배경과 인물이미지에 현대를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 상징들이 있다. 그것은 악령이 살 것 같은 숲과 늪, 거기에 사는 쭈글쭈글한 늙은 노파, 잔디를 다듬고 화사한 꽃들로 가꾸어 놓은 프랑스식 기하학적 정원, 그곳에 사는 쭉쭉 빵빵한 8等身백인여자가 그것이다. 어려서 이 동화를 읽고 감동받으며 자란 세대는 숲을 없애고 늪을 메워 콤파스와 삼각자로 자연개조를 해놓았다. 8等身, 젊음이라는 기준과 분별을 만들고 미달과 늙음은 추가 되고 심지어 악이 되어 버렸다.

라파이유박사가 기업들의 의뢰를 받아 상품판매촉진을 목적으로 소비자들의 특정대상에 대한 인지조사를 한 ‘컬쳐코드(the culture cord)’라는 책에 의하면 미국에서 젊음의 컬쳐코드는 가면(mask)이란다. 미국인에게 젊음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가장할 수 있는 어떤 것, 실제 나이를 숨길 수 있는 어떤 것, 즉 가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미국이 이주민에 의한 200년 남짓한 짧은 청년기문화이기 때문에 젊음을 찬양하고 그것에 매혹된다고 말한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성형수술용 실리콘과 보톡스 등이 가장 많이 소비되고 뷰티산업(젊음 유지 산업? 가면산업?)이 성업인 것을 설명하는 근거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국대중문화에서의 젊음의 컬쳐코드는 미국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극단적이다. 실제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동안열풍은 가히 엽기적이다. 그런데 미국의 젊음에 대한 컬쳐코드의 해석근거인 짧은 역사가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한국에는 반만년 역사라는 사실이 있다. 그렇지만 잠깐이라도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미국의 젊음에 대한 컬쳐코드를 해석하는 근거를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하는데 무리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생활 속에 5000년 역사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우리는 5000년을 자랑스럽고 부끄러운 것을 떠나 그것 자체를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

혹시라도 귀찮고 낡고 돈이 되지 않고 매력을 잃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로마가 2000년 된 도시라는 것을 확인하는데는 다른 노력이 필요 없다. 그냥 서있는 곳 차체가 2000년의 두께를 갖고 있다. 카이로, 바그다드(이제 바그다드는 제외되겠지?), 피렌체, 밀라노, 파리, 퀠른, 교토, 북경 같은 도시들도 다 그 시간의 두께들을 갖고 있다. 굳이 역사책에서 온갖 유구하다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반만년 역사를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동네 우리 집 바로 옆에, 아니 우리 집 자체에 그런 두께가 남아 있다면 .......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에서 그 두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일상 시간과 공간에서 밀려나 화석처럼 모셔진 민속촌 같은 이미테이션 과거는 현재와 소통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 우리의 일상에 작동하는 역사는 200년 남짓 짧은 미국의 역사보다도 짧은 근대100년이 전부인 것은 아닐까? 압축적 산업화 50년의 얼굴에서 5000년 문명과 가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디트로이트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자동차문화의 산실이다. 중앙선, 도시고속도로, 콘크리트고속도로 등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도로를 내거나 주경계를 분할하는데 지도에 자대고 그으면 됐던 그곳에선 캐딜락 같은 푹신한 듯한 서스펜션이 어울린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와 마을과 골목을 잇는 작업은 결코 지도에 자를 대서 해결할 수 없는 역사가 작동한다. 돌로 만든 좁고 오래된 도로들에선 단단한 듯하고 쏠림에 강한 벤츠의 서스펜션이 어울린다. 유럽인들이 장비와 기술이 없어서 울퉁불퉁한 좁은 돌길을 갈아엎지 않는 것일까?


수천 년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유럽과 중국 중동 등의 박물관과는 달리 딱히 보여줄 만한 것이 많지 않은 미국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액션페인팅이나 팝아트 등의 장르가 소비도시의 거대한 미술관 벽을 채울 필요와 태생적으로 충분히 연결되었다.

서구근대를 복제함에 있어 작은 땅에 오래된 역사는 유럽의 그것과 유사하지 결코 짧은 역사에 광활한 땅의 미국과 같지 않음에도 한국의 도로와 도시계획, 교육과 문화시스템은 미국 따라하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반만년 역사의 주름을 2-30년을 주기로 성형수술하면서 젊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기기만은 아닐까? 전 국토를 토목공사장화 하는 거대한 도로와 건물들 틈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극단적으로 옹색해져서 차마 보기 민망해진 역사문화의 켜들 속에 어쩌면 한류나 다이나믹 코리아의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벽돌 한 장을 놓더라도 지난 천년과 새로운 천년을 생각하면서 놓아야 하는 것이 이 땅의 얼굴을 찾는 길이 아닐까?

더 이상 듣보잡이 활개 치는 한반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야기가게 윤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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