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와 '518민중항쟁'

흑백테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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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18. 12:39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토씨 하나차이로 그 말이 지닌 뜻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얼마전 황석영씨가 '광주사태'라고 발언을 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바 있다. 사람들은 왜 '광주사태'라는 말에 흥분을 했을까? 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과 '갑오동학혁명' 그리고 '동학농민혁명'도 다른듯 비슷한 말들이다. 하지만 단어 하나에 사건의 주체가 누구인지 어디까지 포괄하는지 나뉠수 있기에 단어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동학이라는 특정종교의 운동인지, 농민이라는 특정계층만의 운동이었는지 또는 운동이었는지 혁명이었는지 단어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1984년의 동학농민운동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혁명'이냐 '반란'이냐 아니면 '운동'으로 규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5월 18일. 공식명칭은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이다. 국가지정기념일이 되면서 제정된 공식명칭이다. 하지만 황석영씨의 발언이 문제가 될만큼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명칭을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광주사태, 광주폭동, 518민주화운동, 518민중항쟁, 518민중혁명,
518민주화운동기념일, 광주민주화운동, 5월항쟁, 광주학살, 518

극우와 보수진영에선 '광주사태'또는 '광주폭동'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태'와 '폭동'이 의미하듯이 518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 왜곡하는 발언이다. 이 말은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는 군부 발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보수언론에서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폭동'으로 보도하면서 보수층에서 일반화된 표현이다. 이후 신군부가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규정해서 전두환 정권 내내 사용되었다. 

△ '광주사태 최대관용 이성찾아야'라는 제목의 1980년 5월 26일 기사.

반면, 시민사회나 진보진영에선 '518민중항쟁'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신군부에 대항해 저항한 시민(민중)의 자발성에 주목해 표현한 것이다. 어느 특정계층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가 하나가 되어 군부에 저항했기 때문에 민중이란 표현은 적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518민중항쟁'과 '5월항쟁'이라는 단어에서 '광주'라는 지명이 빠진 것도 광주라는 특정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공식 명칭인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은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처음 불렀다고 한다. 이후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에서도 쓰이면서 공식 명칭화 되었다. 적당히 타협한 명칭의 냄새가 솔솔나기도 한다. 마치 5월 1일 '노동자의 날'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국립묘지로 지정이 되고, 국가지정기념일이 되고, 국가유공자가 되었지만 1980년 5월 정신에 대해선 아직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다. 특정지역의 일로, 특정 계층의 일로 의미를 축소시키려 하는 보수단체와 국민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법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아직도 5월 18일 오늘을 왜곡하고 폄하하려는 세력들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만 하다. 29년전, 오늘의 우리들에게 떳떳한 대한민국을 물려주려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시민들이 있었다. 한 소설가는 자신의 '광주사태'발언이 실수라고 말하지만 그 실언에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